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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 스케치북 by 존 버거

LadyYvonne 2013. 3. 16. 22:00
벤투의 스케치북 - 6점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열화당

 

 

- 원제: Bento's sketchbook 

 

벤투는 스피노자의 이름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부분부분을 인용하면서 존 버거 자신의 드로잉도 배치하며 가벼운듯 시작하지만 사실은 무게감있는 이야기들을 펼쳐나간다...

사실 쉽게 읽히는 류는 아니었다... 어떤 부분은 영 감이 안오고 어떤 부분은 술술 읽히고...

괜찮은 책이라고 내 스타일이라고 말하기엔 거리감이 있었지만 옮긴이의 말대로 그의 드로잉들과 스피노자의 철학적 명제가 매우 세련되게 어우러진 우아한 책임에는 동의한다... 구절구절 멈추어 생각해보게 되는 빛나는 이야기들도 많았고...

그리고 나도 이렇게 틈틈이 드로잉을 해야겠단 이미 했으나 계속 행동하지 못하고 있는 결심을 다시한번 다잡게 되기도 하고...

 

 

 

- quote

 

* 정신은 그것이 기억속에 지니고 있는 것들 못지않게 그것이 지성 속에서 인식하는 것들을 느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정신이 실재들을 보고 관찰하는 정신의 눈은 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신체 이전에 우리가 실존했는지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정신은 영원의 관점에서 신체의 본질을 함축하는 한에서 영원하며, 우리 정신의 실존은 시간으로 정의 될 수 없다는 점, 또는 지속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느낀다. - 스피노자, <윤리학> 중

 

* 지나간 무엇과 다가올 무엇에 대한 소속감은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해 주는 점이다. 하지만 역사를 마주한다는 것은 비극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외면해 버리게 하는 이유이다. 스스로 역사에 동참하겠다는 결심은, 설령 그 결심이 절박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희망이다.

 

* 깊이있는 정치적 저항은 부재하는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고, 미래에는 그 정의가 세워질 거라는 희망과 함께한다. 하지만 이 희망이 저항이 이루어지는 첫번째 이유는 아니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것은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중략) 저항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만약 이루어진다면, 작은 승리가 있다. 그 순간은, 다른 순간들처럼 지나가겠지만, 지울 수 없는 가치를 얻는다. (중략) 저항의 본령은 어떤 대안, 좀 더 공정한 미래를 위한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아주 사소한 구원이다. (중략)

 오시프 만델스탐은, (중략) "단테에게 시간은, 동시에 단 한번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역사의 내용이었다. 반대로 역사의 목적은, 시간을 탐색하고 정복하는 일에서 모두가 형제 혹은 동료가 되기 위해 시간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 어떤 이야기에 감명을 받거나 울림을 얻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는, 혹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낳고, 이 일부가, 그게 작은 것이든 광대한 것이든 상관없이. 말하자면 그 이야기의 후예 혹은 후계자가 된다.

 내가 정의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문화적 유산이 아니라 좀 더 특이하고 개인적인 것이다. 마치 누군가 읽은 이야기의 혈류가 그 누군가가 살아온 이야기의 혈류와 만나는 것 같다.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되고 있는, 혹은 앞으로 계속 되어 갈 어떤 모습에 보태진다.

 복잡할 것도 갈등도 없는 가족관계 안에서, 우리를 만들어낸 그 이야기들이, 생물학적 조상과는 다른, 우리의 공통 조상이 된다.

 파리 교외의 누군가, 아마도 오늘 밤 의자에 앉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을 그 누군가는, 이미, 이런 의미에서, 먼, 먼 사촌일지도 모른다.

 

* 부자들은 보통 죽을 때까지 가장만 한다. 그들에게 가장 흔한 가장이 성공이다. 유명세라는 공통의 표정을 제외하면, 그들에겐 자신들이 성취했다고 보여 줄만한 게 전혀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 만약 인간에게 있는 침묵할 수 있는 역량이 말할 수 있는 역량과 동등하다면, 분명히 인간의 삶은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다. - 윤리학 중

 

* 나는, 모든것을 신의 무관심한 어떤 의지에 종속시키고, 모든 것은 그의 만족에 달려 있다고 제시하는 의견이, 신은 모든 것을 선의 견지에서 실행한다고 보는 관점보다는 진리에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밝혀 둔다. - 윤리학 중

 

* 인간의 역량은 매우 제한적이며 외부 원인들에 의해 무한히 압도된다. 따라서 우리는 바깥에 있는 실재들을 우리의 필요에 맞게 일치시킬 수 있는 절대적 권능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의무를 다했으며, 그와 같은 일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킬 수는 없었다는 점, 그리고 우리는 자연 전체의 일부이며 그 질서를 따른다는 점을 의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유용성 원칙이 요구하는 바와 반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평정심을 갖고 견뎌내게 될 것이다. (중략) 우리가 이 점을 (중략) 인식한다면,  지성에 의해 정의되는 우리 자신의 부부느 곧 우리 자신의 최선의 부분은 이에 전적으로 만족할 것이며 그 만족 안에서 존속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으로 인식하는 한에서, 우리는 필연적인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욕망할 수 없으며, 참된 것 이외에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점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한에서, 우리 자신의 최선의 부분이 행하는 노력은 자연 전체의 질서와 일치하게 된다. - 윤리학 중

 

* 드로잉을 할 때 나는, 하늘 길을 찾아가는 새나, 쫓기는 와중에 은식처를 찾아가는 산토끼, 혹은 알 낳을 곳을 알고 있는 물고기, 빛을 향해 자라는 나무, 자신들만의 방을 짓는 벌 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을 받는다. (중략)

 드로잉은 무언가를 꼼꼼히 살피는 형식이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려는 본능적인 충동은, 무언가를 찾으려는 욕구, 점을 찍으려는 욕구, 사물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어딘가에 위치시키려는 욕구에서 나온다. (중략)

 바로 그 상상력의 작동-우리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많은 것들처럼 복잡하고 모순적인 그것-을, 나는 정의 내리고 묘사해 보고 싶은 것이다. 

 

* 사소한 현재들을 구원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행위임을 역설하는 모습은 절박하지만, 그의 그림과 스피노자의 철학적 명제들이 함께 들어가 세련된 책은, 그 연륜에 어울리게, 우아하다. - 옮긴이의 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