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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식으로 보기 by 존 버거

LadyYvonne 2013. 3. 17. 13:09
다른 방식으로 보기 - 8점
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열화당

 

 

- 원제 Ways of Seeing (1972년)

 

1972년 BBC텔레비전 시리즈에서 강의했던 내용을 확장 발전시켜 이 책으로 펴냈다 한다... 그 당시로서는 미술에 대한 파격적인 이야기라 논란이 많이 됐을 법하다... 지금도 여전히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느낌이 강하다... 이 당시에 제기됏던 비판이 아직까지도 유효하단 느낌...

미술작품을 볼때 기존의 아카데믹한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보며 이야기를 해나간다...

여기선 '유화'로 얘길 하는데 결국 그림 작품을 통칭한다고 할 수 있겠다...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내용의 이미지 속에, 그리고 아름다운 정물화 속에, 우아한 초상화 속에 숨어 있는 사실은 과시하려는 보여주기 위한, 남자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자신의 소유물임을 자랑하기 위한 의도들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고 완전 공감...

거기에 현대까지 이어지는, 유화의 그런 점들을 물려받은 광고의 목적이랄까 실체랄까 의도랄까에 대한 얘기도 마찬가지...

아주 친근한 느낌의 책은 아니지만 누구나 읽어보면 유익한 책임에 틀림없다... 

특히 나같이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듯...^^

 

 

- quote

 

*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중략)

 우리가 어떤 것을 볼 수 있게 되자마자, 타인도 우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이렇게 타인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가 가시적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중략) 이와 같은 시각의 상호작용적 성격은 대화의 상호작용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 한 이미지는 X라는 사람이 Y라는 대상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된다. (중략)

 하나의 이미지가 미술작품으로 제시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보는 방식은, 미술에 대해서 교육받은 일련의 가정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미 진실 천재성 문명 형식 사회적 지위 취향 등등)

 

* 원근법은 두 눈이 아닌 하나의 눈을 가시적 세계의 중심으로 만든다. 무한대의 소실점으로 모이듯이 모든 것이 그 눈으로 집중된다. 한때 우주가 신을 위해 정돈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듯이, 가시적 세계는 관찰자를 중심으로 정돈된다.

 원근법의 관습에 따르면 시각적 상호작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에게는 타인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신은 그 자신이 상황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 원근법의 내적인 모순은 신과는 달리 단지 한 장소,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관찰자를 향해 현실의 모든 이미지가 정돈된다는 점에 있다.

 

* 카메라의 발명은 사람들의 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가시적인 것은 이제는 무언가 다른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점은 즉시 회화에 반영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 가시적인 것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제시돼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끊임없는 유동 속에서 도망쳐 사라지는 것이었다. 입체파 화가들에게 가시적인 것은 더 이상 단일한 눈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묘사하는 사물 또는 인물 주위의 여러 다른 각도에서 본 광경들을 한데 모은 전체를 가리켰다.

 

* 원본의 유일무일한 독자성은 그것이 복제의 원본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 이미지가 독자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이유는 그 이미지가 보여 주는 것 때문이 아니다. 그 첫번째 의미는 그것이 보여주는 것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 그 작품이 감동적이고 신비스러워진 것은 시장 가격 때문이다.

 

*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

 

*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 성애의 이미지 대부분은 문자적으로든 은유적으로든 다 같이 똑바로 정면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적 행위의 주인공이 바로 그 이미지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이자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 심지어는 오늘날도 어떤 동네에서는 고전적인 텍스트의 신화를 그림의 주제로 탐구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가치있는 작업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는 그 내재적 가치가 어떠하든, 이 고전 텍스트들이 지배계급의 보다 상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이상화된 행동의 형식을 추구하기 위한 일종의 참조체계를 마련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화가가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물질적 재산을 칭송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질 때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에게 주어진 사회적 지위에 불만을 가질때마다, 화가는 장인으로서 그가 존중해야 한다고 배워 온 전통적 회화기법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갈등하고 싸움에 나서게 마련이다.

 

*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당신을 관심을 갖고 보지만 당신은 그들을 관심을 갖고 보지 않는다.

 

* 왜 광고는 이렇게 유화의 시각적인 언어에 깊게 의존하게 되었을까.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바로 이 소비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이 이미지들이 유화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광고가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시각예술을 대신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그 시각예술이 마지막으로 소멸해 가는 형태가 광고인 것이다.

 

*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기의 현재 생활방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중략) 광고에서는, 만일 그가 광고하는 물품을 구입한다면 그의 생활이 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얘기한다. 광고는 그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상태를 제시한다.

 유화는 시장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이었다. 광고는 시장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중략) 광고는 "만일 당신이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될 수 없다"라는 두려움을 유발시키고 이를 이용한다.

 

* 의미없는 노동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현재는 꿈속의 미래에 의해서 '상쇄돼 버린다.' 이 미래의 꿈 속에서 노동하는 순간의 피동성은 상상적인 행동에 의해 대치된다. 백일몽 속에서 피동적인 남녀 노동자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